littleblacksandle

오만과 편견, 독후감, 실패

쓰고 남음

솔직히 뭐 내 고유의 생각도 아니고 영향 받은 것을 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라고,


세 번째 보는 『오만과 편견』이었다. 2백 년이라는 시간을 격하여 현재에도 소비되는 로맨스라, 충분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재미있었다. 똑똑하지만 계급적으로 평범한 여자, 계급과 재산이 뒷받침되나 오만하고 까탈스러운 성격을 가진 남자가 나쁜 첫인상에서 시작한 오해, 계속해서 쌓이는 오해를 극복하고 사랑을 이룬다는 내용은 이 장르에 문외한인 내게도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다만 처음 읽을 땐 나 역시 이 작품을 편견으로 대한 바가 있다. 부자 남자와 가난한 여자가 만나서 사랑을 한다는 설정은 한국의 드라마 시장에서 닳고 닳은 소재였고, 내게 이 내용은 익숙하다 못해 혐오스러울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재미는 있지만 기억할 만한 작품은 아니라고 고정관념을 가진 채 첫 탐독을 마치고, 다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로맨스 작품들을 소비하고 난 뒤에 재차 읽은 『오만과 편견』은 내 편견을 걷어 주었다.

현대의 로맨스 장르 전체는 제인 오스틴의 설정에 크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이 플롯, 까탈스러운 성격의 부자 남성과 가난하지만 당찬 여성의 이야기 구조를 따른다. 특히나 트렌디 드라마, 할러퀸 로맨스로 나타나는 유형은 문화 소비자들에게 하나의 공해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유사 작품들을 통해 그 원형을 논할 수는 없다. 둘은 전적으로 다른 범주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전자는 그저 소수 여성들이 연애와 결혼에 가지는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것이 전부지만,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인간사의 더없이 중요한 문제 한 가지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무엇을 다루고 있는가? 『오만과 편견』과 후대의 창작물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It is a truth universally acknowledged, that a single man in possession of a good fortune, must be in want of a wife”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첫 문장은 대개 텍스트의 전반적인 내용을 암시하고,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작가의 생각이 가장 함축적으로 담겨 있는 자리이기도 한데, 이 문장 이후로 펼쳐진 서사를 문장에 대입해보면 작품 속엔 단 한 가지 생각이 가장 뚜렷하게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만과 편견』은 결혼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작품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를 인물의 비합리적 행동에 대한 합리적 해석을 바탕으로 표현한다.


진보적 사회는 결혼을 절대적 가치로 두지 않는다. 이혼을 어렵게 하는 사회의 실재적, 비실재적 규범이 모두 증발해버린 상태로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 결혼을 유지하느냐 마느냐, 아이를 낳는가 낳지 않는가- 따위의 문제는 온전히 양자 간 선택의 문제로 국한되었다. 이러한 마당에 결혼의 필요성이나 좋은 결혼이 무엇인가를 떠들어대는 것이 자못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오만과 편견』을 읽은 나는 빅토리아 시대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좋은 결혼은 남녀 양자의 복지와 행복에 크게 기여한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작품에 나타난 결혼의 가치가 지금도 유효하다고 믿는다.


신과 인간의 계약 같은 비현실 속의 계약을 제외하고 나면 인간이 약속에 기반을 둔 거래, 상호계약을 처음 형성한 것은 결혼이 그 시초라 말할 수 있다. 남성은 한 여성(혹은 여러 여성)과의 계약을 통해 자신의 유전자가 안전하게 이어진다는 믿음을 얻었고, 여성은 남성을 통해 안전한 보호(Shelter)와 사회적 지위를 얻고 대가로 성적인 믿음을 주었다. 그리고 때때로 운이 좋으면 애정이라는 요소를 남자로부터 구할 수 있었다. 이 계약은 차츰 보편적인 것으로 인간 사회에 뿌리 깊게 정착하였고, 제도화했다. 남녀는 계약관계 하에서 호혜적 관계를 추구하고, 여기에 낭만적 당위를 위해 애정-로맨스라는 요소가 있다고 서로 착각하거나, 확신한다. 때로는 호르몬에 의해 그렇게 믿거나, 사회적인 요구에 의해 그것이 있다고 여긴다. 결혼은 약간의 애정 위에 신뢰 관계를 쌓음으로써 굳건하게 유지된다.


행복한 결혼을 하는 사람이 그리 많진 않다. 애정이라는 굴레에 매인 채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래가 파경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긴 시간을 두고 사람의 됨됨이와 그 가망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작가가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에게 편견이라는 시련을 부여한 것도 그들의 판단이 경솔한 것으로 비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열매를 맺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쓰기에 앞서 작가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배치했고, 이 이야기들 또한 결혼에 관한 작가의 생각을 담고 있으므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다아시와 리지가 오해를 걷어나가는 이야기를 진행하는 동시에 작가는 나쁜 결혼이 어떤 형태를 보이는가에 대해 상세히 묘사한다. 작품에 등장한 네 쌍의 부부 중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사례는 제하고, 애매한 빙리와 제인을 넘기고 나면 리디아와 위컴 부부, 샬럿과 콜린스 부부의 예가 있다.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재산이 없는 아가씨에겐 오직 결혼만이 명예로운 생활 대책이었고, 결혼이 가져다줄 행복 여부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해도 결혼만이 가장 좋은 가난 예방책임이 분명했다.’


위 문장은 샬럿 루카스가 콜린스 씨와 결혼을 선택하고 난 뒤 작가가 그녀의 진술을 적은 부분이다. 콜린스 씨는 베넷 가의 재산을 상속받기로 되어 있는 남자인데, 그는 자신이 베넷 가의 재산을 빼앗는다는 도덕적 책임감을 덜기 위해, 또 편하게 아내를 얻을 목적으로 베넷 가의 딸들을 찾아와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했다 거절당한다. 묘사된 바로 그는 필요 없는 말을 길게 하고 지루한 소리를 늘어놓는 등 인간적 매력이 전혀 없고 도덕의 화신인 양 행동하지만,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일상적으로 무례를 범하는 인간이다. 콜린스의 이런 요소가 엘리자베스로 하여금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게 한 것인데, 샬럿은 그의 이 지루한 장광설을 전부 들어주고 그의 무례를 참아넘기고 마침내 그에게 청혼을 받아낸다. 직후 샬럿이 내뱉는 이런 진술은 샬럿이 그의 매력 없는 인간성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음에도 불가피한 선택을 했음을 시사한다.


콜린스 부인은 행복을 찾을 수 없는 결혼을 한 대신에 지위와 재산이 있는 남자를 통해 자신의 복지를 꾀할 수 있다고 자위했다. 또, 결혼적령기의 끝자락에 있었기에 불가피했다고 여긴다. 그녀는 행복보다 물적 안정을 높게 쳤고, 스스로는 이를 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결정에 대해 작중 인물들의 평은 회의적이다. 베넷 씨는 샬럿 루카스를 똑똑한 아이라고, 어쩌면 엘리자베스보다 똑똑할 수도 있다 여겼는데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듣고선 그녀가 리지보다 어리석다는 생각을 하며 만족했고,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으리라 여긴다. 로징스를 방문하고 난 다음에는 그녀가 물질적 풍요로부터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을 잠시나마 누리고 있지만, 이후에 남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한다. 샬럿 루카스는 교양 있고, 지적 수준이 높은 인물이지만 결혼 적령기의 끝자락에 놓인 공포, 스스로 현명하다 믿고 내린 지나치게 성급한 결정으로 인해 제 손으로 자신의 행복을 영영 묻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보다 더 심각한 결혼이 소설의 중심 소재로 등장하는데, 바로 리디아와 위컴의 결합이다. 베넷 가의 막내인 리디아는 굉장히 철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소설 시점으로 고작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으나 무도회를 전전하고, 근처 부대의 장교들과 연애를 해보려고 안달이 나 자신의 평판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멋대로 나다닌다. 제멋대로에 통제 불능인데도 어머니 베넷 부인은 딸의 행동을 오히려 부추기고, 베넷 씨는 무신경하게 군다. 이러한 방임은 결국 야반도주라는 결과를 낳는데, 함께한 남자는 위컴이라는 젊은 장교이다. 이야기의 전반부에서 리지와 대화하는 위컴은 제법 매력 있는 인물로 그려지나, 리지가 다아시의 청혼을 거절한 직후에 다아시에게서 받은 해명의 편지로 인해 그 인간성이 폭로된다. 자신의 무절제함과 방종으로 인해 생긴 문제를 옛 주인의 아들이자 은인인 다아시를 비난함으로써 덮으려 했고, 그나마 다아시가 얻어준 장교직을 수행하면서도 도박과 외상 따위로 제 자신을 해쳤다는 사실이 작품의 중반부에 드러난다. 위컴은 애초 리디아와 결혼할 생각 없이 빚이 많이 쌓인 탓에 런던으로 달아난 것이었고, 리디아는 결혼을 하게 되면 좋고, 언젠가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를 따라간 것에 지나지 않았다. 위험하기 그지 없는 일을 리디아는 경솔하게 행했고, 다아시가 도움을 주지 않았더라면 리디아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고 말았을 것이다. 위험천만한 도주 후에 가까스로 결혼에 성공했지만 두 사람의 애정은 이내 식어버리고 방탕한 생활 탓에 주변에 끊임없이 손을 빌리는 추태를 보인다. 이 결혼에서 독자로서 살필 수 있는 잘못된 결혼의 맹점은 경솔하고 성급한, 그리고 일시적인 애정에서 기인한 결혼은 행복한 결혼을 만들기 어렵다는 점이다. 현대의 관점으로 옮기면 경제적 기반이 불안정하며 전망이 불투명한 남자와 만난 지 한 달도 채 안 되어 혼인신고를 하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고 더 신중한 선택을 하기 위해 결혼적령기가 계속 늦어지는 현대사회의 시점으로 빗대어 본다면 리디아의 결혼이 얼마나 철없는 짓인가에 대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들이 좋지 못한 결혼을 하게 된 이유를 정리하면, 전자는 현명함의 탈을 쓴 오독과 성급한 결정이 문제였고, 후자의 경우 올바른 판단을 내릴 만한 지적 수준의 결여와 애정에 눈먼 행실이 문제였다. 이들이 가지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진정 좋은 결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안목이라고 생각한다.


앞선 두 사례는 나쁜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낳은 결혼의 구체적인 사례였다. 잘못된 판단 기준으로 내리는 결정은 결국 인생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고, 그러한 기준마저 없다면 더 나쁜 결과를 만들고 만다. 그렇다면 좋은 안목은 어떻게 좋은 결혼을 만드는가? 도대체 안목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평가나 판단의 기준이 된다거나, 심미안이라거나 자기객관화가 되었다든가 말을 가져다 댈 수야 있지만, 단순히 단어의 의미만을 가지고 와서는 받아들일 만 한 설명을 하기 어렵다.


『오만과 편견』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주목을 하고, 동경하게 되는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결합을 통해 대체 좋은 안목이란 무엇인가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로맨스 소설 속 남녀의 첫 만남에서 독자는 두 사람이 연인으로 맺어지는 상황을 상상하고 바라본다. 빙리와 제인의 군더더기 없는 만남이 그 전형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는 서로의 첫인상(이는 소설의 옛 제목이기도 하다.)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다아시는 그녀를 두고 예쁘지 않다고 말하고, 리지는 그 말에 불쾌함을 느낀다. 첫 무도회 장면에서 엘리자베스의 시점에 대입한 독자들은 다아시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되고, 곧 독자의 입장에선 두 사람의 결합은 요원한 일로 비치고, 오히려 그렇게 되지 않길 바라지 않는 마음이 앞서게 된다. 곧 등장하는 위컴에게 엘리자베스가 호감을 느끼고, 독자 역시 따라 느낀다. 다아시에 대한 그의 근거 없는 비방에 동조하는 엘리자베스를 보고, 독자 역시 동조한다.


합리적이고 교양 있는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마저 첫인상에 근거하여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그 생각을 바탕으로 서로에 대해 해석하고 행동한다. 엘리자베스는 내내 다아시를 비꼬려 들고, 다아시는 연정을 품은 채로 엘리자베스의 신분과 주변의 경박한 사람들을 멸시한다. 그리고 그 감정을 엘리자베스에게 여과 없이 전하기도 한다. 이후에 엘리자베스의 혐오감은 위컴의 근거 없는 비방을 따라 더욱 커지고, 다아시의 연심은 그녀의 신분과 주변에 대한 멸시 속에서 끊임없이 자라나다 첫 번째 청혼을 한 후 박살 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결국 함께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야말로 두 사람에게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인상에서 비롯한 불쾌감을 걷어낼 사건이 있었다 하더라도 두 사람이 서로를 판단함에 심미안이 없었다면 결혼이라는 결과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현명한 태도를 몇 가지 장면에서 읽을 수 있었다. 다아시의 첫 번째 청혼, 편지를 받은 후 위컴에 대한 리지의 태도 변화, 캐서린 부인과 엘리자베스의 대화, 결혼을 앞둔 두 사람의 대화가 그 예가 된다. 여러 장면이 있으나 가장 적절한 장면 두 가지만 옮겨 적겠다. 편지를 받은 직후 엘리자베스의 진술과 다아시 씨의 두 번째 청혼을 받아들인 후 엘리자베스와 다아시 사이의 대화이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걸 이제야 처음으로 깨달았으며, (중략) 그때 그는 다아시 씨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데 조금도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런 행동은 그가 다아시 씨의 부친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그분의 아들에게 창피를 주지는 않을 거라고 다짐한 것과 모순된다는 사실에도 생각이 미쳤다.

이제 그녀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다아시를 생각하든 위컴을 생각하든 자기가 눈이 멀었고 편파적이었으며 편견에 가득 차고 어리석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행동이 그렇게 한심했다니!" 그녀는 외쳤다. "변별력에 대해서만큼은 자부하고 있던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똑똑하긴 하다고 자랑스러워하던 내가! 때때로 언니가 너무 너그럽고 솔직하다고 비웃으면서 쓸데없이 남을 의심함으로써 허영심을 만족시켰던 내가! 이제야 깨닫다니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중략) 그렇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 허영심이었어. 처음 만났을 때 한 사람은 나를 무시해서 기분이 나빴고, 다른 한 사람은 특별한 호감을 표시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서, 난 두 사람에 관해서는 선입관과 무지를 따르고 이성을 쫓아낸 거야. 지금 이 순간까지 난 나 자신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거야."

“제 미모는 처음부터 인정 안 하셨고, 태도에 대해서라면, 당신에 대한 제 행동이야 가까스로 늘 무례를 면했다고나 할까요. 말을 건넸다 하면 그냥 지나가지 않고 당신께 고통을 주려고 했지요. 이제 속내를 털어놓아 보세요. 제 건방진 점 때문에 제가 마음이 드셨나요?”

“당신의 마음이 생기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건방지다고 해도 될 거예요. 거의 그랬으니까요. 실상은 말이에요, 당신은 예절이라든가, 경의라든가, 괜스러운 친절 같은 것이 지긋지긋했던 거예요. 언제나 당신의 인정만 받으려고 말을 건네고 바라보고 생각하는 여자들에게 염증이 나 있었어요. 제가 그런 여자들하고 너무 달랐기 때문에 당신은 정신이 번쩍 나서 흥미가 생겼던 것이죠. 당신이 진정으로 상냥한 분이 아니었다면, 그 때문에 절 미워했을 거예요. 스스로를 감추려고 애쓰는 가운데서도, 당신의 감정은 늘 고귀하고 정당했어요. 마음속으로는 당신에게 잘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을 철저히 경멸했던 거지요. (…후략)”


나는 작품 속에서 나타난 두 사람의 캐릭터가 가지는 미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았다. 우선, 그들은 자기객관화가 잘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다아시 씨는 청혼을 거절당하고 자신이 보다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말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어떤 종류의 가식도 혐오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다아시의 편지를 받은 직후 엘리자베스는 위컴에 대한 평가를 수정하며 자신의 안목이 똑바르지 않았음을 스스로 비판한다. 작품 말미에 엘리자베스는 스스로를 다아시에게 말할 때 당신께 고통을 주는 식으로 말했으며 건방진 데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올바르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고통스럽더라도 이를 받아들일 줄 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주체적인 의지를 가지고 행동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캐서린 영부인이 엘리자베스에게 찾아와서 자신의 조카와의 결혼을 접을 것을 종용했을 때, 엘리자베스와 다아시 사이에 확실해진 것은 없었고, 다아시가 리디아에게 베푼 은혜를 알았기에 편견이 없어진 상태가 전부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엘리자베스는 캐서린 부인의 위협에 맞서 제 의견을 당당하게 표명하고, 그녀의 무례한 제안을 거절한다. 다아시는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거절당한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제 뜻으로 그녀의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해결해주었다. 타인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좋게 평가하려는 제인이나, 친구의 뜻에 별 저항없이 따르는 빙리와는 확연히 대비가 되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이들은, 특히 엘리자베스는 타인에 대한 합당한 평가를 내릴 줄 안다. 다아시는 엘리자베스의 가족에 대한 박한 평가를 내린 것 외에는 사람에 대해 정확한 평가를 내리진 못했지만, 엘리자베스에 대해선 전적으로 옳았다. 리지는 자신의 언니에 대해 타인을 비판적으로 보지 못한다고 말하고, 빙리의 누이들이 제인을 어떻게 대하는지 금세 간파하며, 다아시의 동생 조지애나가 오만하지 않고 단지 수줍음이 많은 것뿐임을 쉽게 알아차린다. 이는 사람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수반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평가인데, 관찰이 작가의 가장 기본적인 미덕임을 고려해볼 때 엘리자베스는 작중 인물 중 작가 본인이 가장 많이 투영된 캐릭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하여 나는 이 세 가지를 곧 ‘결혼-연애에 필요한 안목’이라고 통칭한다. 자기객관화와 주체성을 가진 의지, 관찰에서 비롯한 합당한 평가.

이것이 곧 가장 이상적인 결혼과 연애담을 만들 수 있었던 배경이다.


다아시 같은 이성은 있다. 엘리자베스 역시 당신 주변에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수줍어하고, 연인에게 올바른 말 하기를 꺼리지 않는 품성의 남자가 있다면 보통의 여성들은 그의 가능성보다는 이러한 단점에 질색하기 마련이다. 말도 제대로 안 트고 지내다 어느날 갑자기 나에 대한 비난이 섞인 말로 고백한다니, 어느 누가 받아들이고 싶겠는가? 또한, 자존심에 상처 입길 극도로 꺼리는 수컷들은 이지적인 여성을 꺼린다. 하지만 이들이 겉보기로 보이는 단점보다 더 큰 장점을 가지고 있음을 똑바로 볼 수만 있다면 성공적인 연애, 안정적인 결혼을 함께할 상대를 만나는 일이 여느 드라마처럼 우연에 가까운 일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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